경주에서 선전으로: 아시아태평양의 새로운 협력 시대, 그러나 감춰진 딜레마
들어가며: 화려한 선언 뒤의 그림자
2025년 11월 1일, 천년 고도 경주에서 막을 내린 APEC 정상회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직면한 복합적 도전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했습니다. '지속 가능한 내일 구축(Building a Sustainable Tomorrow)'이라는 주제 아래 AI 혁신, 인구 구조 변화 대응, 무역 회복력 강화라는 세 축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 의제는 겉으로는 미래를 향한 희망의 메시지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깊은 모순과 딜레마를 품고 있습니다. AI는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으며, 인구 구조 변화는 노동력 부족을 우려하지만 청년 실업은 심화되고 있고, 공급망 회복력 강화는 자유무역을 외치지만 보호주의는 강화되고 있습니다.
경주 APEC의 핵심 성과와 내재된 모순
1. AI 이니셔티브: 혁신인가, 대체인가?
경주 회의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 제시된 2026-2030년 APEC AI 이니셔티브는 AI가 혁신, 생산성 향상, 경쟁력 제고를 통해 경제를 근본적으로 재편할 잠재력을 강조합니다. "모두를 위한 AI의 혜택"과 "인간 중심 접근"을 천명하며, 안전하고 접근 가능한 AI 생태계 구축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AI와 자동화 기술은 실제로 중간 숙련 일자리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으며, 기업들은 신입 채용을 줄이고 기존 인력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특히 데이터 입력, 고객 서비스, 초급 회계, 기초 코딩 등 전통적으로 신입 사원이 담당하던 업무들이 AI로 대체되면서, 청년들의 노동시장 진입 경로 자체가 막히고 있습니다.
이니셔티브는 "인력 역량 강화"와 "리스킬링·업스킬링"을 강조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질문을 회피합니다.
AI 이니셔티브의 "자발적 경제별 AI 준비도 검토"와 "정책 교류"는 선언적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질적으로는 기술 선진국과 후진국 간 격차가 심화되고, 각국 내에서도 AI 수혜 계층과 피해 계층 간 양극화가 가속화될 것입니다.
2. 인구 변화 프레임워크: 노동력 부족과 청년 실업의 역설
APEC 인구 변화 협력 프레임워크는 저출산, 고령화, 도시화에 대응하는 포괄적 체계를 제시합니다. 특히 "고령 노동력과 변화하는 소비시장"을 우려하며, 모든 세대의 경제 참여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치명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프레임워크는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우려하지만, 현실에서는 청년 실업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자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기업이 원하는 형태의 노동력(저임금, 고숙련, 유연한 계약)과 청년들이 제공할 수 있는 노동력(초급 수준, 안정적 고용 희망) 간의 미스매치가 심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프레임워크는 "평생 교육 기회 확대"와 "직업훈련"을 제안하지만, 이는 청년들에게 끊임없이 자기계발하라는 압박을 가하는 동시에,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논리입니다.
AI와 자동화로 신입 일자리가 사라지는데, 더 많은 교육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요?
특히 "실버 경제 발전 지원"은 고령층 소비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보지만, 이는 청년 세대가 안정적 일자리를 얻지 못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면서 저출산이 더욱 심화되는 악순환을 간과합니다. 인구 정책은 세대 간 형평을 고려해야 하는데, 현재의 프레임워크는 청년 세대의 절박함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 무역·공급망 회복력: 자유무역의 수사와 보호주의의 현실
경주 선언은 "강건한 무역과 투자가 필수적"이라며 글로벌 무역 체제 수호를 강조합니다. 동시에 "공급망이 다중적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인정하고 회복력 제고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이 두 목표는 본질적으로 충돌합니다. 공급망 회복력 강화는 실제로는 "전략적 자율성" 또는 "리쇼어링"을 의미하며, 이는 글로벌 분업 체계의 약화, 즉 보호주의의 다른 이름입니다. 각국이 반도체, 배터리, 의약품 등 핵심 산업의 자국 내 생산을 강화하면서, 전통적인 비교우위 기반 무역은 축소되고 있습니다.
이는 신흥국과 개도국에게 특히 치명적입니다. 선진국의 리쇼어링과 자동화는 개도국의 제조업 일자리를 감소시키고, 이는 다시 청년 실업 증가로 이어집니다. APEC의 "포용적 성장" 수사와 달리, 실제로는 기술 격차와 경제 격차가 심화되는 양상입니다.
구조개혁 의제(SEAASR)는 "혁신, 생산성, 역동성 촉진"을 내세우지만, 이는 종종 노동시장 유연화, 규제 완화 등의 이름으로 청년들에게 불안정한 고용 환경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선전 APEC(2026): 딜레마의 심화인가, 돌파구인가?
1. 기술혁신 허브의 양면성
중국이 선전을 차기 개최지로 선택한 것은 기술 혁신을 강조하려는 의도지만, 동시에 기술 경쟁과 디커플링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선전은 화웨이의 본거지로, 미국 제재의 직접적 타깃입니다.
시진핑이 "AI와 디지털 경제 협력 강력 추진"을 약속했지만, 현실에서는 미중 기술 전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기술 표준의 분열, 데이터 흐름 제한, 투자 제한 등은 오히려 청년들의 글로벌 기회를 축소시킵니다. 과거에는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며 국경을 넘나들던 청년 인재들이, 이제는 진영 논리에 갇혀 선택지가 제한되는 상황입니다.
2. 개방의 수사와 블록화의 현실
분석가들은 선전 선택이 "개방과 통합의 의지"를 보여준다고 평가하지만, 실제로는 경제 블록화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RCEP, CPTPP, IPEF 등 지역 협정들은 포괄성보다는 배타성을 특징으로 하며, 이는 중소기업과 청년 창업가들에게 더 복잡하고 불확실한 환경을 만듭니다.
"대만구(Greater Bay Area) 시너지"를 강조하지만, 이는 역내 통합이 심화되는 동시에 역외와의 장벽이 높아지는 양면성을 지닙니다. 홍콩의 청년 실업률이 이미 높은 상황에서, 선전과의 경쟁 심화는 청년들에게 더 큰 압박이 될 수 있습니다.
3. "혁신 생태계"의 배타성
선전의 화웨이, 텐센트 등 거대 기술 기업들은 확실히 혁신의 아이콘이지만, 동시에 극소수 엘리트만이 접근할 수 있는 폐쇄적 생태계이기도 합니다. 이들 기업의 채용은 갈수록 더 선별적이 되고 있으며, AI와 자동화로 인해 신입 채용 자체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모두를 위한 AI"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AI 전문가와 다수의 AI 대체 노동자로 양극화가 진행됩니다. 선전 APEC이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할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또 하나의 기술 엘리트 축제에 그칠 위험이 있습니다.
숨겨진 핵심 딜레마: 신입 채용 감소의 구조적 원인
AI와 생산성의 역설
기업들은 AI로 생산성을 높이지만, 그 과실은 신입 일자리 증가가 아니라 기존 고숙련 인력의 효율성 극대화로 귀결됩니다. 하나의 베테랑이 AI 도구로 과거 신입 5명의 일을 처리하면, 기업 입장에서는 신입을 채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는 경험 축적의 사다리가 끊어지는 문제를 야기합니다. 신입 시절 단순 업무를 하며 산업을 배우던 전통적 경로가 사라지면, 미래 세대는 어떻게 전문성을 쌓는가? 이는 장기적으로 인적자본 형성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인구 감소와 청년 실업의 역설
고령화로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자리의 질과 양이 동시에 악화되고 있습니다. 저출산은 노동력 부족이 아니라 청년들의 경제적 불안정에서 비롯되는데, 이를 해결하지 않고 "평생 교육"과 "유연한 고용"만 강조하는 것은 악순환을 강화합니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의미 있고 안정적인 일자리가 없어서 고통받습니다. 긱 이코노미, 플랫폼 노동, 단기 계약직이 늘어나지만, 이는 경력 형성도, 미래 설계도 어려운 구조입니다.
무역 재편과 신입 기회의 축소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면서 대규모 제조업 일자리가 자동화 시설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선진국으로 돌아오는 공장은 로봇이 운영하고, 남아있는 개도국 공장도 효율화로 인력을 줄입니다.
이는 전통적인 산업화-일자리 창출 경로가 막혔음을 의미합니다. 과거 한국, 중국이 겪었던 "제조업 고용 → 중산층 형성 → 내수 확대"의 선순환이 이제는 불가능해지고 있으며, 이는 개도국 청년들에게 특히 절망적입니다.
경주와 선전이 답하지 못한 질문들
- AI가 대체하는 일자리보다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인가?
선언문은 "AI의 혜택"을 강조하지만, 일자리 순감소 가능성에 대한 솔직한 진단이 없습니다. - 젊은 세대는 어떻게 경력을 시작해야 하는가?
신입 일자리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평생 학습"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진입 경로 자체를 재설계해야 합니다. - 기술 격차는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자발적 협력"과 "역량 강화"는 구체성이 없습니다. 누가 비용을 부담하고, 누가 혜택을 받는가? - 보호주의와 자유무역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공급망 회복력 강화가 실제로는 블록화를 의미한다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대응책을 논의해야 합니다. - 세대 간 형평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고령화 대응과 청년 고용을 동시에 다루려면, 자원 배분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대안적 관점: APEC이 진정으로 다뤄야 할 것들
1. 보편적 기본 소득 또는 청년 기본 자산 논의
AI가 일자리를 대체한다면, 일자리와 소득의 연결 자체를 재검토해야 합니다. APEC 차원에서 사회안전망 혁신 실험을 공유하고, 청년들에게 창업이나 재교육을 위한 기본 자산을 제공하는 방안을 논의해야 합니다.
2. 기술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
AI로 이익을 얻는 기업들이 신입 교육과 재교육에 실질적으로 투자하도록 하는 메커니즘이 필요합니다. "자발적 협력"이 아니라 구체적인 의무 조항을 검토해야 합니다.
3.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
생산성이 높아진다면, 더 적은 시간 일하고 더 많은 사람이 일하는 구조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주4일제, 안식년 제도 등을 지역 차원에서 실험하고 성과를 공유해야 합니다.
4. 청년 이동성 보장
기술과 무역 블록화가 심화되더라도, 청년들의 학습과 취업을 위한 국경 간 이동은 최대한 보장해야 합니다. APEC 청년 비자, 역내 학점 인정, 자격증 상호인정을 확대해야 합니다.
5. 기술의 민주적 통제
AI 발전 방향을 시장과 기업에만 맡기지 말고, 노동자와 청년을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합니다. "인간 중심 AI"가 수사가 아니려면, 결정 과정에 인간이 참여해야 합니다.
맺음말: 솔직함에서 시작하는 진정한 협력
경주 APEC은 "지속 가능한 내일"을 약속했고, 선전 APEC은 "개방과 혁신"을 외칠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방향이 지속 가능하지도, 진정으로 개방적이지도 않다면, 이는 공허한 수사에 불과합니다.
AI, 인구 구조 변화, 무역 재편은 각각 복잡한 과제지만, 이들이 결합하면서 만들어내는 딜레마는 더욱 심각합니다. 특히 신입 채용 감소와 청년 실업 심화는 이 모든 모순이 집약된 현상이며, 이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 한 어떤 선언도 현실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경주에서 선전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의미를 갖려면, 화려한 비전 뒤에 숨은 구조적 모순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 기술이 일자리를 줄인다면, 이를 인정하고 소득과 일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합니다.
- 인구가 줄어든다면,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발전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합니다.
- 무역이 블록화된다면, 블록 내 포용성이라도 최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청년 세대가 미래의 주역이 아니라 현재의 희생자가 되는 구조를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2026년 선전에서 APEC 정상들이 진정으로 답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AI와 함께 번영할 것인가, 아니면 AI에 의해 대체될 것인가?"
"우리는 모두를 위한 성장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소수만을 위한 혁신에 만족할 것인가?"
"우리는 청년들에게 기회를 줄 것인가, 아니면 끊임없는 경쟁만을 강요할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솔직하고 구체적인 답변 없이는, 경주의 선언도, 선전의 약속도, 결국 또 하나의 잊힌 문서가 될 뿐입니다.
진정한 협력은 아름다운 수사가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함께 마주하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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